
1
짙은 어둠 속에 있었다. 생은 그늘졌고 가족은 병들었다. 어느 이민자의 삶처럼 가족은 세계를 겉돌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을 몰랐고,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몰랐다. 삶에 가족이 침투할 공간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가족은 모두 제각기 살았고 제각기 버텼다.
생은 지리멸렬했다. 생존이라는 증명서는 쉽게 교부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세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를 입학하던 무렵 엄마를 잃었다. 고독 속에서 아버지는 살았다. 거칠고 모난 시장 바닥에서 아버지는 지지 않고 물건을 더 많이 떼오기 위해 언성을 높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안위를 챙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자기 의견을 쉽사리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시장바닥에서 일하다가 운명처럼 엄마를 만났고 결혼해서 나와 동생을 낳았다.
아버지는 도매시장의 양념동에서 마늘과 각종 양념들을 팔거나 납품하며 살았다. 아버지의 주머니에는 늘 마늘 여러 알이 들어 있었는데, 퇴근 후에는 늘 식탁 위에 마늘 몇 개를 올려놓고 방에 들어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엄마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성에 차지 않거나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화내고 윽박지르는 그를 엄마와 나는 증오했다. 아버지는 홀로 술을 마셨다. 형제와 연락하는 일도 적었고, 외부에서 친구나 지인을 만나는 일도 없었다. 아버지는 늘 외로워 보였고 또 괴로워 보였다. 취기 오른 아버지는 방이 떠나가라 웃으며 티브이를 보다가 잠들곤 했는데, 새벽 세 시가 되면 귀신 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그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출근도 어두운 길을 홀로 걸었고 퇴근도 어둑한 뒷골목을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가족이 없었고 사랑을 몰랐다.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몰랐다.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살아 있는 것은 슬픔이었다. 문드러진 몸으로 한 발자국도 스스로 내딛지 못한 채 골방에 갇혀서 나는 살았다.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비 내리는 음습한 그늘 아래에서도 똑같았다. 나의 몸은 새집증후군과 중증 아토피로 너덜거렸고, 온몸이 소나무 껍질처럼 짓이겨져서 진물이 처마 밑을 타고 흐르는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열아홉 살 무렵 가을의 일이었다.
하루하루가 눈물이었다. 다리를 펴면 다리 살이 찢어졌고, 팔을 펴면 팔 안쪽 피부가 진피층을 드러내며 갈라졌다. 지이익거리는 소리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나는 고통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아무도 나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신이 내린 벌 같았다. 할 수 있는 일은 돈을 벌어서 병원에 가고 약을 먹고 연고를 바르는 일이 전부였다. 엄마는 울었고 아버지는 화를 냈다. 빌어먹을 세상, 도대체 기댈 곳이 없다며 우리 가족은 전국을 누볐다. 참숯가마 찜질방에서 온몸을 지지며 목초액으로 샤워를 하거나 죽염을 미숫가루처럼 퍼먹었다. 대구 한의원에서 배독요법을 한다며 하루종일 목욕탕에서 땀을 빼기도 했고, 대학병원에서 각종 임상실험과 진드기 치료, 인터페론 주사, 면역치료를 하고 한약을 물처럼 마시는 등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차도는 없었다.
생은 지랄맞음이었다. 엄마는 여자로 살지 못했다. 사춘기 내내 남자 형제 넷과 동거했다. 다섯 형제 중에 엄마만 여자였으므로, 희생은 늘 엄마의 몫이었다. 전쟁터 같은 시장 바닥은 늘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흘러갔고, 그 속에서 엄마의 요구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라서 청소하고, 여자라서 상차림을 도왔다.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았고 어떤 것도 얘기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외간 남자를 만나는 일도 할머니는 거부했다. 자유가 결박된 삶. 엄마는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으나 그 어떤 자유도 가지지 못한 채 나이를 먹었다.
그런 엄마와 아버지가 만나서 결혼했다. 우연이었고 한편으로는 필연이었다.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를 낳았고, 동생을 낳았다.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았다. 헤픈 씀씀이, 술을 물처럼 마시는 일, 가족에게는 막 대하면서 남에게는 간과 쓸개마저 퍼주려는 행동, 전날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력, 항구와 시장에서 다진 거칠고 모진 말투, 급하고 드센 성격과 권위주의가 짙게 밴 사고구조 등을 엄마는 힘들어했다. 엄마의 한풀이는 끝이 없었다. 살풀이하듯 엄마는 악다구니하며 온갖 아픈 기억을 쏟아냈는데, 그럴 때면 정말 굿하는 사람 같았다. 말의 흐름은 끝이 없었고, 어두움은 짙었다. 나는 짓이겨진 피부로 엄마의 한풀이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생은 핏물로 엮은 감옥 같았다. 그것은 너무 끈끈해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동생은 홀로 자랐다. 홀로 컸고 홀로 고민했다. 그에게는 살아가는 일 자체가 짐이었다. 그늘 짙은 가정 아래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공부했고 홀로 학교에 들어갔으며 홀로 학교에 낼 돈을 벌었다. 직장인 밴드에 들어가 공연을 하거나 기타를 가르치는 일을 하며 꿈을 키우기도 했다. 흔들리는 가족 속에서 동생만은 저 스스로 몸을 가누며 버텼다. 버텨서 살았고, 꿈을 꾸었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가족이었다. 나와 동생은 나와 동생은 엄마와 아버지의 자식으로 살면서 불안과 고독을 밥처럼 씹었다. 수없이 맞으며 악바리 근성을 키웠고, 끊임없는 다툼 속에서 살며 분쟁을 조정하는 법을 비웠다. 제대로 살아가려면 아버지처럼 악바리로 생에 매달려야 했고, 엄마처럼 끈질기게 생이 휘몰아치는 강바람에 맞서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약했다. 홀로 버티기도 벅찼다. 우리 가족은 무너지는 배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무기력했다. 도대체 인생에 맞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매일 밤 나는 그렇게 하늘에 물었다.
2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졌다. 응급실에 실려 갔다. 부리나케 달려갔더니 아버지는 멀건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빠진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괜찮냐는 말에 괜찮지 그럼이라고 대답하는 무심함, 나는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숨을 헐떡거렸고, 가슴 통증을 느꼈는데,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아버지는 스스로 119를 불러 병원에 갔다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도대체 정신이 없다며,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하는 아버지를 엄마는 나무랐다. 아버지는 13일간 병원에서 지내며 치료를 받았다. 병원이 감옥 같다며 지겨워했지만, 별수가 없었다. 의사가 “죽고 싶소”라고 하는 통에 꿀 먹은 병아리처럼 8인실의 병상에서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병실은 좁고 시끄러웠다. 아버지는 매일 창밖을 넋 놓고 보거나 병실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곤 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고, 때로는 제 몸을 벗어나 세상을 유랑하듯 떠도는 듯한 모습이기도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말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오늘이 내 마지막 날이구나…하고.”
시간이 흘러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제각각 다른 삶을 살았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 애썼다. 어느 계절에 한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밥을 먹을 때였다. 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아파보니까 네 마음을 알겠더라.” 뜻밖의 고백이었다. 엄마가 화를 냈다. 그것 좀 아팠다고 뭘 안다고 그러냐고, 역정을 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말에서 진심을 읽었다. 어쨌든 죽을 것만 같았다는 느낌은 본인에게만은 진실이었고, 나는 그것과 내 고통을 비교하는 일을 두고 옳고 그름을 말할 필요는 없는 거였다. 아버지가 뒤이어 말했다. 너를 알겠다고, 이해하겠다고, 너의 마음이 어땠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야 알겠다고 내게 고백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옛 내 모습을 떠올렸다. 망막박리증, 백내장, 비강 낭종, C형 간염, 유리체절제술, 새집증후군, 통풍, 천식 등을 앓았던 순간들. 하루하루가 눈물이고 고통이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권위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떠맡아서 우리를 키우던 엄마, 홀로 고독하게 성장해갔던 동생과 늘 아픔 속에서 방황하던 내가 새벽의 그늘 어딘가에 있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종종 내게 건강을 물었다. 아토피가 신문 기사에 나오면 오려서 내게 보여주기도 했고, 가끔 전화해서 어느 한의원이 유명하다고 하니 꼭 가보라는 말도 건넸다. 나는 아버지의 호의가 어색했지만 내심 고맙기도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편에는 그런 질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그 찬란한 순간에 겪어야 했던 참혹한 눈물의 시간을….” 그 물음은 좀처럼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인제 와서 달라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건 이제는 봉합할 수 없는 찢어진 흉터에 불과했다. 아무리 꿰매려 해도 살이 되붙지 않는 말라붙은 살덩이들, 그것이 우리 가족의 상처였다.
3
어느 날이었다.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옛이야기가 불쑥 나와서 오랜 시간 동안 묵혀 있던 얘기들을 하나둘씩 꺼내놓았다. 수없이 이사하고, 장사하다가 말아먹고, 집에 불이 나서 난리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다친 데 없이 너희가 장성해서 취업 준비를 한다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짓던 아버지. 그 옆에서 엄마는 인상만 찌푸리며 밥을 먹고 있었고, 나와 동생은 아버지 기분을 맞춰주며 허허로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래도 야, 내가 살면서 너희들 언제 한 번 때린 적이 있냐, 나는 없어! 손찌검은 안 했어!” 순간 엄마와 동생이 폭발했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기억 안 나요?!”라며 외려 엄마와 동생이 윽박질렀다. 나도 무언가 마음에 동해서 거들었다. “진짜 기억 안 나요? 쳐다보면 쳐다본다고 때리고, 개도 그렇게 안 먹는다고 때리고, 말 안 듣는다고 때리고, 오락실 갔다고 나무 빗자루가 부러지도록 때리고, 발가벗겨서 때리고, 얼마나 맞았는데요?!” 나의 말에 엄마와 동생도 거들었다. 아버지는 눈이 동그래졌고, 여러 차례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말똥해졌고, 나와 동생, 엄마를 여러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내가 그랬나? 진짜 그랬나?”
아버지는 여러 차례 되물었다. 정말 놀란 듯했다. 엄마와 동생은 끊임없이 옛이야기를 쏟아냈다. 속에 담긴 설움을 담아서 한풀이하듯이 앓던 속을 내뱉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우리의 말을 들었다. 자신만의 아픔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듣던 순간, 나는 아버지의 진심을 엿보았고, 아버지는 자신이 잊어버린 과오를 자각했다. 그리곤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한참 동안 손등을 쓰다듬고 두드렸다. 아버지의 눈이 여린 사슴으로 변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 눈을 나도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미안한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네가 가슴에 큰 응어리를 안고 살았구나. 아버지가 몰랐다. 네가 마음고생이 많았겠네. 아이고 자슥…. 아무튼 내가 잘할게.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나는 믿기지 않아서 가족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가족들도 놀란 눈치였다. 가족들의 얼굴 위로 지난 서러운 기억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 모든 순간이 꿈처럼 아늑했고 따스했다. 이런 순간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현실 속에 있는지 꿈속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 가슴에 들어찬 큰 돌덩이 하나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4
한때 나는 우리 가족이 병든 가족이라 생각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서 서로를 증오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고 여겼다. 가난한 환경, 병든 육체는 버틸 만했다. 그러나 병든 가족은 버티기 어려웠다. 각자의 아픔 속에서 모두 각자의 마음만 우선하며 살았고, 너의 말보다 내 말이 옳다는 것으로 모든 대화가 점철되었다. 우리는 만나면 싸우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아픔이 서로 맞잡은 두 손, 서로를 이해하려는 눈빛으로 나아져 가는 것이었다. 이해와 사랑, 그것만 있으면 되었는데, 그것을 아는 게 너무 오래 걸렸다. 나는 아버지가 잡은 손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서 너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너무 행복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와 동생은 취직해서 서울로 올라왔고, 엄마와 아버지는 고향에 남아 일을 계속했다. 서로 떨어져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흘러간 시간 속에 남은 마음의 낡은 조각들을 하나씩 걷어냈다. 아버지의 사과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엄마의 희생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아픔은 우리의 성장에서 꼭 필요한 자양분 같은 거였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아버지의 성장 과정을 들으며 평생의 한으로 남은 그들 마음의 그늘을 보았고, 그들이 받은 사랑만큼 자식을 사랑하려 너무도 애썼다는 사실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기에 때로는 상처를 주었다고, 온전히 사랑하려면 서로를 온 힘 다해 꽉 껴안을 필요는 없는 거라고, 단지 같은 방향을 보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며 함께 걸어가기만 해도 충분한 거라고, 그래, 서로의 손에 전달되는 따스하고 깊은 사랑의 체온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 무엇도 우리를 병들게 할 수는 없다는 걸 나는 배웠다.
“독감 주사 맞았나? 이제 진짜 맞아야 된데이. 너는 몸이 약해서 무조건 맞고, 서울서 고생 많이 하는 거 알지만 너무 힘들고 그러면 집에 전화도 하고 으잉? 아직까지는 그래도 아버지 엄마가 다 네들 뒤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알긋재??”
“아버지도 감기 조심하세요. 당뇨도 그렇고요. 요즘 날씨가 왔다 갔다 해서 한 번 감기 걸리면 오래가니까요. 몸 조심하시구요.”
근래의 우리 대화다. 지난날로써는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이다. 시간이 지나 서로를 이해한 만큼 우리는 이해와 사랑이 싹튼 모습이다.
돌이켜보면 나와 가족은 서로에게 아픈 가시 같은 사랑이었다. 나는 나로서도 아팠지만, 서로가 있어서 아프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서고 싶지만 늘 아프게 했던 고독한 우리 가족이 이제 조금씩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너무 늦은 것 아니냐고? 사랑에 늦고 빠름은 없다. 다만 영원하냐 찰나에 끝나느냐만 중요할 뿐이다.